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연애와 결혼 === ||다음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하시오. *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시오. *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오시오. *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일 *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 나와 당신 간의 관계에 있어,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시오. *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 아인슈타인이 결혼한 후 사이가 나빠진 뒤, 그의 부인 밀레바에게 제시한 요구서[* 물론 결혼 초기부터 대뜸 이런 통보를 한 것은 아니었고, 사이가 나빠진 후에 보낸 메모라고 한다. 당연히 밀레바가 이러한 요구를 지킬 리 없었고, 이 메모를 보낸 것 때문에 부부 관계가 더욱 나빠져 아인슈타인은 결국 이혼당하고 만다.]|| 그의 과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크게 비판받는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결혼 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우선 첫 번째 부인 밀레바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밀레바는 1875년 12월 19일생으로 아인슈타인보다 3세 연상이다. 지금이야 3세 정도의 연상연하 커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가 남자보다 1살이라도 많으면 꺼리는 분위기가 저변하게 깔려 있었다. 다만 재혼도 사촌누나랑 한데다 첫 여친도 두 살 연상이었던 걸 보면 아인슈타인의 여성 취향이 확고히 연상쪽이었던 모양...],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생지가 현재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티텔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지역이다. 즉 민족 배경으로 보나 실제 국적으로 보나 외국인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밀레바는 1900년 대학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졸업장을 따려고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1901년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시험 준비가 좌절되었으며, 1903년에 둘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도 연구지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중립국으로 피신했고, 첫 번째 아내인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시기 동안 친척 누나이자 당시 과부였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6년생.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의 사촌의 딸이자,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의 언니의 딸이다. 따라서 이종사촌 누나 겸 6촌 누나가 된다. 출생 당시 성은 아인슈타인이었는데, 결혼하면서 남편인 막스 뢰벤탈(Max Löwenthal)의 성을 따라 성이 뢰벤탈로 바뀌었다가 아인슈타인과 재혼하면서 성도 도로 아인슈타인으로 되돌아갔다. 자녀로는 전 남편 소생의 딸 2명이 있었다.] 그리고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소홀히하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렇게 1919년 밀레바와 이혼한 후 같은 해에 엘자와 결혼했다. 물론 위인전 같은 책에서는 이런 일을 상세히 기술하기 곤란하므로, 대부분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 사이가 멀어져서 이혼했다는 정도로만 기재하는 편이다. 문제는 이혼 후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장녀인 리제를은 태어난지 1년 만에 요절했다.] 신경을 써 주지 않아 밀레바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는 것.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 교사로 활동하며 자식들을 홀몸으로 키웠는데, 밀레바와 이혼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이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을 모두 [[https://www.technologyreview.com/s/427621/did-einsteins-first-wife-secretly-coauthor-his-1905-relativity-paper|밀레바에게 양도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인지]] 나중에 그녀가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해도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밀레바와 자식들이 아인슈타인을 평생 미워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차남이었던 에두하르트[* 1910년 7월 28일생]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는 바람에 밀레바와 장남 한스를 힘들게 했다.[* 음란한 사진으로 자신의 방을 도배하고 헛소리를 하며 횡설수설하고 발광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에두하르트는 20대에 집에서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고 자살기도를 하며 어머니 밀레바의 목을 졸라서 죽이려 했던 일 때문에 형 한스의 신고로 출동한 스위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생 스위스의 정신병원에 사실상 수감되다시피 입원한 채로 살다가 1965년, 55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래도 밀레바는 차남 에두하르트를 아껴 그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을 때도 스위스에서 살며 정기적으로 아들을 찾아오며 돌봐주었고 1948년에 73세로 사망할 때도 스위스에서 죽었다. 밀레바의 장남 한스[* 1904년 5월 14일생]는 부모의 뛰어난 지능을 물려받아 총명해서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나중에 뛰어난 토목공학자가 되었다. 특히 한스는 아버지 아인슈타인과 달리 결혼 생활은 원만했고, 아내와 자식들과 손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정신분열증을 앓던 동생 에두하르트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생각해주어 스위스로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동생의 병원비를 보내주었고[* 한스가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전에는 밀레바가 에두하르트의 병원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밀레바는 한스가 병원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기 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동생이 말년에 가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는 병원비를 스위스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해주고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옮겨주어 살게 했다. 게다가 1965년에 동생이 사망했을 때 지역 신문에 장문의 글을 쓴 부고를 실어 동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과 어머니와 동생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를 평생 미워했고 부모 취급도 하지 않았다. 특히 결혼하고 손자를 얻어도 아버지에게 연락하거나 찾아가지 않았으며 아인슈타인의 부고를 듣고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고, 장례식장에 찾아가지도 않았으며 나중에 신문에 짤막한 애도문을 몇 줄 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책임한 도피 이후 일련의 불행을 겪었으니 [[자업자득|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인슈타인 본인도 여생에 큰 미련은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높은 성취와는 별개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아니었던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